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틴 학살 (문단 편집) == 여담 == * 당시 폴란드 장교의 처형을 담당한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블로힌(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Блохин, 1895–1955) NKVD 소령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사형집행자'로 기록되었다.[[http://kwangju.co.kr/read.php3?aid=1325602800457026087|#]]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 당시 혼자서 수만 명을 죽였다고 알려진 그는 카틴 숲에서도 28일간 6천여 명을 총살했다고 추정된다. 깃털 모자를 쓰고 도살업자처럼 가죽으로 된 긴 앞치마, 팔꿈치까지 오는 장갑 등 특유의 복장을 갖추고 모스크바에서 공수한 독일제 발터 모델 2 권총(저위력 호신용 탄종인 .25ACP를 사용한다)으로 처형자의 두개골 아래를 쏘았다. 블로힌은 워낙 일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평균 3분마다 한 명을 살해했다고 한다.[[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worldwar2&no=42229|#]] 이 덕분에 블로힌 소령은 [[준장|소장]] 계급까지 진급해 장군이 되었으나 훗날 [[천벌]]을 받았는지 스탈린 사후 베리야가 처형되고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정책이 시작된 다음 [[권고사직]]당한 뒤 [[술]]에 절어 지내다가 스탈린이 죽은 지 2년 만인 [[1955년]]에 공식적으로 '[[자살]]'했다. * 사실 소련의 이와 같은 학살은 폴란드만이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 초창기에 연방으로 억지로 통합한 나라 대다수에서 흔하게 벌어진 일이었다. 또한 소련의 본진인 러시아 본토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탄압당하거나 [[대숙청]] 당시에 처형당한 사람만 수십만명에 넘어갔을 지경이니 이들 지역에서는 뻔할 뻔자이기는 했다. [[아르메니아]], [[조지아]], [[타지키스탄]] 등 각지에서 좌우파를 따지지 않고 반소적인 이념이나 주장을 하던 많은 지식인들을 끌고 가 불문곡직으로 전원 사살, 암매장했다. 문제는 카틴 학살처럼 크게 알려지지도 못하고 기록조차 없어 아직도 그들이 어디에 묻혔는지 도통 모르는 사건이 허다하다는 점이다. 그나마 타지키스탄은 우연히 한 나무꾼이 당시 타지키스탄 내 지도자들을 학살하는 현장을 목격하곤 수십여 년 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자식들에게 그 장소를 이야기했고 소련이 무너진 다음에야 그 자식들이 이 사실을 알렸다. 타지키스탄 정부는 그 장소를 파낸 끝에 학살된 지도자들의 유골과 유품들을 찾아냈고 이 장소를 성지화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그들을 기리는데, 아직도 이렇게 묻혀진 곳을 찾지 못해 아쉬워하는 다른 옛 소련 가맹국들에게 부러움을 받고 있다. 그 밖에 [[키르기스스탄]]도 일부 학살 현장이 이전부터 알려져서 독립하자마자 거길 파내어 1937년에 학살당한 인사들의 시체 137구와 유품을 찾아내기도 했으나, 여기도 상당수의 다른 학살 현장은 알려지지 못했다. *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획득한 폴란드 포로들은 대략 24만여 명이고 이 중에서 12만여 명은 1939년에서 40년 사이에 석방되거나 자력으로 탈출했다. 나머지 포로들은 포로수용소 열 곳에 분산 수용되었는데, 문제는 적정 수용규모는 실제 포로 수의 절반 정도였던 데다 설비 자체가 극단적으로 열악하여 포로들의 불만이 안 생기려야 안 생길 수가 없었던 것. 당연히 수용소를 관리하는 소련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게 되었고 또한 포로에게 들어가는 보급품도 영 좋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이 스탈린과 NKVD의 실무진들로 하여금 폴란드 장교단에 대한 학살을 결정하는 요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10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핀란드군]] 포로수용소는 정작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군 포로를 고작 1천여 명밖에 잡지 못했고, 그나마도 규모가 가장 작은 수용소에 몰아넣었는데도 여유공간이 남아돌 지경이었다. 결국 딴 생각이 있어서 학살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확실한 사실은 폴란드군 학살 희생자 대부분이 사회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이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답이 나온다. * 포로가 된 폴란드 장교들이 모두 "카틴 학살"에서 살해당한 것은 아니며 잡힌 포로 중 절반(약 2만 명)은 소련이 설정한 "심사기준"을 통과하여 살아남았다. 이런 경우는 폴란드 장교들의 성향에 대한 조사 중에서 친소련적(덤으로 반나치는 아닌) 경향을 보인 사람-지그문트 베를링(Zygmunt Berling) 중령이 대표적-이거나 외국의 외교기관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인 사람들, 내무인민위원회에서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은 사람-스타니스와프 스비아니에비치(Stanisław Swianiewicz) 교수가 대표적으로 포로 성향 심사시에 유창한 [[러시아어]]로 협조한 것이 심사를 책임진 바실리 자루빈의 눈에 띄어 카틴 숲 부근의 역에 도착했을 때 학살 대열에서 빠져나왔다-들 및 "기타" 분류로서 3개 포로수용소에서 폴란드 포로들의 동향을 은밀히 알려온 사람-최소한 장군 한 명이 이에 속했다-들이다. * 카틴에서 처형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폴란드군 장병들은 후에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일부는 영국으로 출국하는 것을 허가받아서 폴란드 망명 정부 아래에서 싸우거나[* 그 유명한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이 이들을 지휘했다. 참고로 안데르스는 소련이라면 치를 떠는 강경한 [[민족주의]]자였다고 한다.] 소련군 산하 폴란드군에 합류하여 나치와 싸웠다. 소련은 이들조차 못 믿어서 이 부대에 폴란드계 소련인들을 입대시키는 방법으로 감시했다. 참고로 단순히 감시 목적만은 아니었다. 카틴 학살에서 워낙 많은 폴란드 장교와 부사관들이 죽었기에[* 위에서 죽은 이들의 숫자를 보면 알겠지만 한 국가의 군대를 충분히 꾸릴 수 있는 규모다.] 이들을 보충할 수가 없어 폴란드계 소련인들을 장교로 꽂아넣은 것. 가장 유명한 사람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폴란드명 콘스탄티 로코소프스키)가 있으며 이외에도 [[https://en.wikipedia.org/wiki/Stanislav_Poplavsky|스타니슬라프 포플랍스키]](폴란드명 스타니스와프 포프와프스키) 등이 있다. * 하지만 이 폴란드계 소련인들은 [[폴란드어]]를 잘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소련 시민으로 살아서 폴란드인이라기보다는 소련인으로의 정체성이 더 강했기 때문에[* 이들 중 소련 정부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종교를 믿던 이들도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정교회 신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도 폴란드계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현지 문화에 동화되어 정교회를 믿는 경우가 많으며, 폴란드 본토에 사는 소수의 정교회 신도들은 대부분 러시아 등 동슬라브계 후손이거나 러시아 치하에서 러시아화된 폴란드인의 후손이다.]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더욱 크게 샀다.[* 폴란드계 소련인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가 스탈린의 명령으로 초대 폴란드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다가 소련의 앞잡이라는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쫓겨난 바 있다.] [[폴란드 침공]] 당시 소련군에 포로가 되었으나 살아남아 후에 친공산 폴란드군을 이끈 지그문트 베를링 장군은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폴란드인들이 나치에 대항하여 일어난 [[바르샤바 봉기]]를 지원하려고 했으나 이 봉기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스탈린은 베를링 장군을 해임하였다. 어쨌든 이 친공산 폴란드군은 [[베를린 공방전]]에도 참가하였고 후에 [[폴란드 인민 공화국|폴란드 공산 정부]]가 군을 재건할 때 주축이 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서방 측에서 싸운 폴란드 망명 정부 산하 반공 폴란드군의 장병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국이나 미국에서 어렵게 살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